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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삶] 길고 긴, 예민인의 번아웃 극복 여정

로사(Rosa) 2024. 11. 7. 23:32

 

 

'당겨쓰기'에는 분명히 대가가 따른다. 까먹고 있었지만.

 부제: 나도 몰랐다니까요 내가 힘들다는걸

 

  처음 커리어 방향을 틀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을 때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생활 패턴의 변화였다. 오랫동안 정해진 루틴대로만 지내다가 갑자기 급하게 확인할 이메일, 작성해야 할 문서, 걸어야 하는 전화, 오늘 넘겨야 하는 파일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을 때의 기묘한 공허함. 분명 해방감이나 후련함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아주 잠깐 뿐이었던 것 같다.

 

  사실 처음 며칠은 아무 할 일이 없는게 너무 이상해 하도 집안을 서성거리며 없는 일을 찾아서 하니까 룸메이트가 제발 좀 앉기라도 하라고 야단을 쳤었다. 넌 지금 쉬는 방법을 모르는거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정확한 관찰이었다. 그런데 그땐 나도 몰랐지 내 생활 패턴이 강박적이었던걸. 그리고 그 뒤로 몇 년에 걸쳐 아주 길고 고달픈 후폭풍을 맞으리라는 것도.

 

 

 

 

  무리한 스케줄인줄도 모르고 억지로 소화해내며 살다가 몇 년만에 처음으로 공백기가 생기니 뒤늦게 몰려온 정신적 피로감이 굉장했던 기억이 난다. 늘어날대로 늘어난 고무줄이 다시 새 것처럼 팽팽해질 수 있을 리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때는 미처 거기까지는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에너지가 한껏 떨어진 상태로 나가떨어지듯이 가지게 된 휴식이었으니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여행도 다녀오고, 휴식기를 가져야겠다고 처음 결정할 때 '절대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정해뒀던 몇 주도 축 늘어진 채로 보내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는데, 웬걸. 힘이 하나도 없다. 아니, 기력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쉬었는데도. 연락을 넣어놓고 기다리고 있던 프로젝트도 있고, 앞으로 혼자서 해야 하는 일도 산더미고, 공부해야할 것도 많은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의욕이 없다. 

 

  그래도 지난 몇 년, 혹은 지금까지 한평생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끈기있게, 아무튼 다들 그래야 한다는대로 살아온 습관이 있으니 억지로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서 시작은 했다. 그런데 집중이 안된다. 머리도 안돌아간다. 일을 하다가 잠깐 주의가 흐트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명백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것 같은 심한 집중력 저하 현상이 그 뒤로 한참동안 떠나질 않는다. 의욕도 돌아오지 않는다. 일이 생각했던 페이스로 진행되지 않으니 거기에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능률이 떨어지니 그만큼 더 오래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더 의욕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돌파구가 안보이는 악순환이다.

 

 

 

 

  사실 기분이 그러면 주위에 조언이라도 구하는게 맞는데, 당시에는 이미 심리적으로 구석에 몰릴대로 몰려있었던 터라 시야가 굉장히 좁았다. 어떻게든 이 당혹스러운 증상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과포화 상태였던거다. 그렇게 몇 달동안 혼자 머리만 싸매고 있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건너편에 앉아서 가만히 듣다가 말해준다. 너 번아웃 온거라고. 그게 번아웃이라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몇 초 동안 반강제적인 멍을 때리다가 고개를 드니 친구가 심란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돼서 멀뚱멀뚱 앉아있다가, 잘 안 돌아가는 머리에서 대충 만들어진 질문이 새어나온다. 내가 번아웃이 왔다고....? 내가? 그랬더니 한심하게 보는건지 더 걱정스럽게 보는건지 구분이 잘 안가는 얼굴로 한숨을 쉰다. '갈 길이 멀겠다'고.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모든 중독 치료의 첫걸음은 현 상황에 대한 자각, 즉 '내가 어떤 것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와 수용이 기본이라고 한다. 나 또한 예외 없이 내가 쉴 새 없이 굴러가는 쳇바퀴 자체에 중독되어 있었다는걸 인식함으로써 아주 긴 정신건강 회복의 여정을 시작했다. 번아웃, 완벽주의, 선척적 예민함(HSP) 등등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고비가 줄줄이 등장하는, 그리고 억울하게도 이것들이 대체 뭐길래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공부부터 해야하는, 장장 7년여 간의 여정을.